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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첫 통기타밴드 '바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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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대중음악박물관
댓글 0건 조회Hit: 1,798 작성일 19-01-26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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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첫 통기타밴드 ‘바보스’, 트윈폴리오(‘세시봉’ 출신 포크밴드)보다 먼저 포크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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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8m 높이의 기타 조형물이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 남쪽 입구에 자리해 있다. 기타 조형물의 실물 모델은 해외의 한 유명 기타 제조업체가 제작한 ‘M-36 김광석 트리뷰트 에디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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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명소로 자리잡은 대구시 중구 대봉동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이 인파로 가득 찬 모습.
 
6·25전쟁 이후 우리사회는 미국식 시스템을 전격 도입하면서 근대화된 도시 설계에 박차를 가했다. 미국화와 도시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대중의 감수성은 이미 변하고 있었다. 미군의 주둔과 더불어 미국의 대중문화가 밀어닥쳤고 한국대중음악은 미국대중음악의 강한 영향권 아래에서 전개된다. AFKN 같은 방송을 통해 스탠더드팝이 부상하고 음악 마니아들이 성장했으며 DJ 문화가 유입되었다. 대구 대중음악의 스펙트럼은 현란하게 펼쳐졌다. 1950년대 초 군인을 위한 댄스장이었던 ‘육군홀’과 ‘공군홀’ 문화, 중구 향촌동에서 시작된 음악감상실과 다방문화의 흐름은 뒤에 국일, 대화 등 독보적인 카바레문화와 회관문화를 탄생시키고 이후 나이트클럽 밴드와 음악다방, 비어홀과 바(bar)의 생음악문화로 이어진다. 그런 가운데 1960년대 중반부터 팝송을 즐기는 젊은이들이 증가하고 통기타와 그룹사운드라는 청춘문화가 서서히 떠올랐다. 

60년대 축제섭외 1순위 청구대 ‘바보스’
전국재즈축제서 송창식·윤형주팀 눌러

政局 경직 70년대 청년들 음악감상실로
교동 ‘해바라기’무대 전인권도 못 올라
大百앞 ‘이브살롱’ 조영남·송창식 활약

80년대엔 포그니 등 라이브무대 20여개
신촌블루스·백두산 멤버들도 이곳 출신

90년대 서태지돌풍에 인기 시들해졌지만
김광석, 소극장투어로 포크정신 지켜내

2009년 김광석길 조성되며 다시 대구 주목


#1. 70년대 포크의 성지 대구

대구의 첫 통기타 밴드는 1964년 청구대(현 영남대) 출신 방성용, 하경안, 백창대가 만든 통기타 보컬 트리오 ‘바보스(The fools)’다. 그들은 서울 세시봉을 축으로 한 ‘트윈폴리오’보다 한 해 앞서 캠퍼스 포크문화에 불을 댕겼다. 당시 ‘바보스’는 지역 대학 축제 1순위 초청밴드였다. 그들은 제1회 전국 재즈페스티벌에 출전해 송창식과 윤형주 팀을 본선에서 누르고 은상을 차지했다. 당시 지역에는 첫 캠퍼스 보컬밴드인 ‘Savage’가 있었고, 대학연합보컬밴드 ‘아스팔트’ 등이 있었다. 방성용은 이들을 규합해 대구지역 대학생 음악클럽인 ‘블루스카이’를 조직하기도 했다.

통기타가 보다 대중적으로 확산된 진원지는 ‘YMCA(기독교청년연합회)’로 여겨진다. 1963년 서울YMCA에서 청소년, 직장인, 주부 등 각계각층 시민들이 각국의 민요, 가곡, 동요, 영화음악 등을 함께 배우고 부르는 ‘싱어롱 Y, 다 함께 노래 부르기’ 캠페인을 시작했다. ‘싱어롱(Sing-along)’은 1970년대 ‘건전가요 부르기’의 열풍으로 이어지며 큰 인기를 끌었다. 대구에서는 1966년 7월15일, 전 대구YMCA 사무총장 전호영이 처음으로 ‘싱어롱’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매주 토요일 YMCA 강당에서 진행한 2천여회의 ‘싱어롱’은 대구에 엄청난 기타 붐을 일으켰고 시내 악기사마다 통기타 판매 코너가 증설된다. 전호영은 매력적인 베이스와 멋진 통기타 솜씨로 모임을 이끌었으며 노래모음집도 여러 권 만들었다. ‘싱어롱’은 1960년대 말 포크송, 즉 통기타 노래 붐으로 확산되었고 이후 캠프 송, 레크리에이션 송 문화로 자리잡는다.

1970년대는 암울했던 시절이다. 유신헌법, 민청학련사건, 긴급조치 9호 등으로 정국은 경직되어 있었고 갈 곳 없던 청년들은 대부분 음악감상실 등으로 몰려들었다. 생맥주와 통기타, 장발과 청바지로 무장한 대학생 포크 전사들도 대학가 골목이나 동성로와 향촌동의 주점 등에서 팝송을 들으며 젊음의 불꽃을 피웠다. 지역의 음악감상 인프라는 1950년대 전성기를 누린 녹향과 하이마트를 선두로 시보네, 카네기, 빅토리아, 올림푸스, 행복의 섬, 포크니 등 음악감상실과 은좌, 무아, 돌체, 왕비, 중앙, 심지, 미주 등 음악다방을 축으로 발달해나갔다. 이들은 음악과 문화를 사랑했던 젊은이들의 공간이자 새로운 한국 대중문화의 산실이었다. 

통기타 가수들의 무대로는 1970년대 초 교동시장 초입에 문을 연 ‘해바라기’, 대구백화점 북측 신세계백화점 지하에 있던 ‘이브살롱’, 코리아백화점의 ‘코리아음악감상실’ 등이 있었다. 해바라기는 언더그라운드 통기타 가수들의 무대였고, 이브는 조영남, 송창식, 이석, 홍민 등 주로 메이저급 통기타 가수들의 무대였다. 그즈음 김진규 DJ를 축으로 한 BBC FM이 등장해 향후 10여 년간 대구 팝문화를 주도한다. 1974년에는 대구의 첫 통기타 가수 모임인 ‘YDFC(영 대구 포크싱어 클럽)’가 탄생해 대구역전 미문화공보원(USIS) 2층에서 창단 기념 콘서트를 열었다.

해바라기는 대구 최초의 통기타 라이브 무대로 무명 통기타 가수들이 가장 서고 싶어 한 꿈의 장소였다. 주인은 아무나 무대에 세우지 않았고 자연히 음악은 고급스러웠다. 1973년 어느 날, 당시 무명이었던 전인권이 해바라기에 나타난다. 그는 오디션에서 닐 영의 대표곡을 불렀지만 까다로운 해바라기의 무대에는 오르지 못했다. 그는 동성로의 한 여관에 머물며 코리아음악감상실 무대나 영남대 단과대 축제 등을 기웃거리다가 대구를 떠났다. 해바라기 출신으로는 강영철, 하사와 병장, 문무상, 이무아, 손대권, 강병성, 박영규 등이 있다. 강영철은 뒤에 양하영과 혼성듀엣 ‘한마음’을 결성해 ‘가슴앓이’ ‘갯바위’ 등을 히트시키며 1980년대를 풍미하게 된다. 하사와 병장 역시 해바라기가 배출한 최고의 가수로 히트곡 ‘목화밭’은 서울에서 내려와 대구백화점 옆에 사무실을 낸 작곡가 진남성의 작품이다. 코리아음악감상실 라이브 무대에서 오디션을 본 통기타 듀엣 ‘콩 심는 아이들’도 그 시절 한 획을 그었다. 그들은 대구시민회관 대강당과 녹향 음악감상실에서 세 번 리사이틀을 열었는데, 세션 멤버 없이 통기타 두 대만 들고 리사이틀을 한 것은 지역에서 처음이었다. 

대학가의 통기타 붐도 만만찮았다. 1979년 3월, 경북대 안에 대구 첫 대학캠퍼스 통기타 동아리인 ‘청음반’이 창단되었다. 초대 회장은 박운용이다. 청음반의 가장 큰 공적은 1980년부터 시작된 복현가요제로 이는 달구벌 대학가요제의 효시가 된다. 경북대 전교생 대상 기타 강습회를 여는 등 통기타 음악 확산에 힘을 쏟았다. 청음반은 지나치게 순수 지향적이란 비판도 받았다. 이후 캠퍼스 곳곳에서 민중가요가 들불처럼 확산되었을 때 일부 회원들이 탈퇴해 1990년 민중가요 노래패인 ‘소리타래’를 만들게 된다. 소리타래는 대구의 ‘노찾사’로 시위나 집회현장을 순회했다. 대구는 포크정신이 가장 강렬하게 피어난 곳 중의 하나였다. 청음반을 거쳐 간 회원 500여 명은 지금도 통기타 선율과 함께 그 명맥을 잇고 있다. 


#2. 80년대, 음악다방 전성시대

1980년대 초 대구의 대중음악 인프라는 전국 최고였다. 나이트클럽, 회관, 디스코장, 주점, 카바레, 음악다방, 음악감상실, 라이브클럽 등 지역 뮤지션들에게 대구는 천국과도 같은 도시였다. 당시 유흥가의 화두는 ‘음악다방’이었다. 대구에는 코러스, 행복의 섬, 무아, 포그니 등 20여 개의 통기타 라이브 무대가 있었다. ‘코러스’는 1982년 중구 동일동 아카데미극장 맞은편 골목 안에 싱어롱 전문 라이브클럽으로 문을 열었다. 코러스의 별명은 ‘합창의 집’이었다. 70년대 통기타 문화를 경험한 80년대 젊은이들은 단순한 음악 감상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함께 노래하기를 원했고 그러한 욕구를 충족시켜 준 곳이 코러스였다. 코러스 테이블에는 1천여곡이 담긴 노래모음집이 비치돼 있어 함께 노래할 수 있었다. 

‘코러스’의 저력은 그곳을 거쳐 간 이름들로 가늠된다. 신촌블루스 출신의 김형철, ‘아직도 너를 사랑해’를 히트시킨 이상래, 신촌블루스 객원 보컬 신재형, 서울경기권 대표적 여성 통기타 가수였던 신세은, 그리고 정두천, 강주희, 박종남, 윤장열, 전우창 등도 코러스 멤버였다. 록 그룹 ‘각시탈’의 김태욱, 록그룹 ‘백두산’의 기타리스트인 김도균도 코러스의 열정을 지켜본 이들이다. 코러스를 만든 사람은 석씨 삼형제였다. 막내인 석소현 사장이 3대, 4대가 엄중용, 마지막 사장은 통기타 가수 이용철이었다. 코러스는 90년대 중후반 삼덕동으로 잠시 이전했지만 포크음악의 쇠퇴로 결국 문을 닫았다. 당시의 코러스 스타들은 현재 대구 통기타 가수들의 맏형으로 자리잡고 있다.


#3. 90년대를 지나 새로운 포크의 부활

1990년을 넘어서면서 한국의 포크 음악은 점점 퇴조한다. 93년에는 ‘서태지’ 돌풍이 불었다. 이러한 가운데 전국 소극장 투어를 성공시키며 대한민국 포크정신을 수호한 이가 대구 출신의 김광석이다. 그는 매해 음반 발표와 소극장 라이브 공연을 병행하며 관객과의 직접적인 교감에 전력을 쏟다 1996년 1월6일 세상을 떠났다. 그는 한국 모던 포크의 진정한 계승자였고 그의 공연은 소극장 공연 문화를 정착시키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김광석 외에 김두수, 윤영배, 박창근 등도 소수의 마니아를 거느린 거인들이다. 은둔의 음유시인 김두수는 80년대 국내 최고의 언더그라운드 포크가수였다. 포크 록 주자 윤영배는 영남대 캠퍼스 밴드 ‘에코스’ 출신으로 가수 이효리의 롤 모델로 통한다. 그는 1993년 ‘제5회 유재하 음악경연대회’에서 동상을 받았으며 2013년 세번째 앨범 ‘위험한 세계’를 발표해 2014년 제 11회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모던록 노래상, 최우수 모던록 음반상, 올해의 음반상을 받았다. 박창근은 1993년 대학생 포크그룹 ‘우리 여기에’를 결성해 영남권 대학교 축제판 등을 주름잡았다. 그의 2집 음반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기회를’은 2005년 한국대중음악상 상반기 비평가추천 음반에 선정되었다. 박창근은 1997년부터 2005년까지 주말마다 동대구역 앞 등에서 자선 버스킹에 나서기도 했다.

1990년대 후반이 되자 전국적으로 전원카페 통기타라이브 붐이 일어났다. 대구는 가장 맹렬했다. 팔공산에는 ‘시인과 농부’ ‘산과 배’ 등 무려 60여개 통기타 라이브 업소가 경쟁을 했고 시내는 물론 대구 각처에 수많은 라이브 카페가 포진했다. 그러나 통기타 라이브 카페 붐은 2000년대 초까지 지속되다 고사했다. 이러한 가운데 1999년 한국포크싱어협회(회장 이승재)가 출범했고 2000년 7월에는 한국포크싱어협회 대구지회가 설립되었다. 

2009년 중구 대봉동 방천시장 인근에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이 조성된다. 전국의 음악 애호가들이 몰려들었고 ‘버스커’들이 대거 등장한다. 2011년 8월 김광석의 음악을 담은 영화음악제를 시작으로 같은 해 10월 ‘제1회 김광석 노래부르기대회’가 열렸다. 2013년에는 전국 버스커의 김광석 노래부르기 경연대회가 개최되었다. 2015년부터 대구포크페스티벌이 열리고 2016에는 대구와 광주 포크음악인들이 통기타를 매개로 ‘달빛통맹’을 맺었다. 김광석은 홀로그램으로 다시 태어나 무대에서 노래했다. 대구의 포크 가수 김강주, 김동식, 김민지, 김종락, 박준석, 배재혁, 손정우, 신재형, 이용섭, 이용철, 정혜윤, 조진영, 최재관 등은 모두 긴 시간을 통해 다져진 실력자들로 지역의 크고 작은 장소에서 꾸준히 공연을 펼쳐왔다. 많은 통기타 가수들이 명멸했으나 그 불꽃은 결코 꺼진 적이 없다. 포크 음악은 음악창의도시 대구에서 다시 불타오르고 있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영남일보. 김형찬, 한국대중음악사 산책, 알마, 2015. 장유정, 한국 대중음악사 개론, 성안당,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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